다가오는 퇴임, 느린 걸음으로 돌아보다
요즘 나는
어딘지 모르게 걸음이 느려졌다.
급할 것도, 서두를 것도 없는 하루하루.
서류 뭉치를 넘기던 손끝에도,
사무실 창밖을 바라보는 눈길에도,
언제부턴가 묵직한 감정이 조용히 스며들고 있다.
‘정년퇴임’이라는 단어는
예전엔 멀고도 막연한 말이었다.
그저 뉴스 속에서, 선배들의 이야기 속에서
마치 나와는 상관없는 먼 미래처럼 흘러가던 말.
하지만 지금은 내 이름을 조용히 부르며
어깨 너머로 다가와 있다.
마음 한켠에는
기다려왔던 긴 휴식 앞에서의 안도감도 있다.
이제는 이른 아침의 분주한 알람 소리도,
출퇴근길의 숨막히는 긴장도,
복잡한 인간관계의 눈치 보기조차 하지 않아도 된다는
묘한 해방감이 있다.
하지만 또 다른 한켠에는
이 모든 익숙했던 풍경들이
이제는 나 없이 돌아가게 될 거라는
묘한 쓸쓸함이 있다.
내 자리가 텅 비고,
내가 남긴 말들이 기억에서 잊혀지고,
함께 웃고 싸우고 견뎌온 사람들이
각자의 방향으로 조금씩 멀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
나는 정말 잘 살아온 걸까?
그 오랜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남긴 걸까?
나를 기억하는 누군가의 마음속에
나는 어떤 사람으로 남아 있을까?
그런 질문들이 문득문득 찾아와
사무실의 고요한 오후를 더욱 고요하게 만들고,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는 풍경조차
조금은 다르게 보이게 한다.
서서히 삶의 속도가 느려지고,
내가 걸어온 길이 끝자락에 가까워졌다는 걸
마음은 먼저 알아차리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요즘의 나는 사소한 풍경 앞에서도 자주 멈추게 된다.
식당 창가의 햇살, 탕비실 커피 냄새,
회의실 문틈으로 들려오는 웃음소리조차
왠지 모르게 소중하게 느껴진다.
퇴임은 단순한 ‘마침표’가 아니다.
그건 오래도록 살아낸 시간들에 대한 ‘쉼표’이며,
또 다른 문장을 시작하기 위한 ‘여백’이다.
나는 지금,
그 여백을 어떻게 채워갈지,
어떤 문장을 써 내려갈지
천천히, 그리고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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