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과 함께 자라는 것들
장마비가 잠시 주춤한 일요일.
흐릿한 구름 사이로 간혹 햇살이 고개를 내밀던 오후였다.
어제 본 모습과는 또 다르게, 수박줄기와 애호박 줄기가 놀랄 만큼 길게 뻗어 있었다.
물기를 머금은 흙 위로 싱그러운 잎사귀들이 마치 세상에
자신을 증명하듯 끝없이 뻗어 나가고 있었다.
오이도 주렁주렁, 고추도 주렁주렁.
이대로라면 다음 주쯤이면 따뜻한 밥상 위에 첫 수확이 올라오겠지.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식물은 이렇게 하루하루 자라는데, 우리는 얼마나 자라고 있는 걸까?
올해 들어 부쩍 아내가 다리를 자주 아파했다.
어제는 결국 병원에 다녀오더니,
약봉지를 조심스레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이제 자주 누워 있어야겠네…”
말끝을 흐리는 그 모습에 괜히 마음 한쪽이 서늘해졌다.
결국 작은 주말농장은 어느새 내 몫이 되어버렸다.
호미를 들고 잡초를 뽑으며 생각했다.
세월이라는 녀석은 참 야속하다.
젊음이 한창일 때는 그저 흘러가는 줄도 모르고 달리기만 했는데,
이렇게 한 걸음씩 뒤돌아보는 시기가 올 줄이야.
이제는 두 무릎으로 땅을 짚고 흙과 더 가까이 지내야 하는 나날들이다.
아내의 무릎도, 내 허리도 세월 앞에서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슬프기만 한 건 아니다.
식물도 그렇지 않은가. 줄기 하나가 꺾이면 다른 줄기가 그 자리를 채우고,
한쪽 잎이 시들면 또 다른 새 잎이 움튼다. 삶도 그럴 것이다.
우리가 조금씩 고장 나고 닳아 없어져가는 대신,
마음 안에는 그보다 더 단단해진 무언가가 자라나는 법이다.
나는 여전히 아내와 함께 밥상 앞에 앉아 웃고 있고,
이렇게 흙 냄새 나는 작은 밭 한 귀퉁이에서도 세상을 배운다.
삶은 꼭 젊을 때만 아름다운 건 아니더라.
오히려 조금씩 고장이 나고 부서지며 그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오는 순간들이 더 찬란하다.
비 온 뒤 물기 머금은 나뭇잎이 더 반짝이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그렇게 흠뻑 젖어야 더 빛나는 거 아닐까.
아마 다음 주쯤, 밥상 위에 처음 올라올 오이 한 개를 보며 또 한 번 생각하겠지.
'이것도 세월 덕분이다.'
오늘도 그렇게, 나는 흙을 만지고 세월을 만지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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